이런 비극적인 방식으로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어.
open

가토 로카유gateau rocaille

25세 | 184cm | 76kg | Male | 귀족

0


사막의 밤하늘을 닮은 칠흑같은 머리칼은 군의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어린 시절과 비슷한 모양으로 단정하게 정리되어있다. 두터운 눈썹, 살짝 내려간 눈꼬리에 노란 눈동자는 전체적으로 상대에게 다정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으나, 오르텐시아 졸업 이후 그 눈동자가 반짝이는 일은 친구들을 만났을 때 외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유약한 천성을 숨길 수 없어 눈동자에 여러 감정들을 전부 드러내고 다닌다. 나이가 들어도 앞으로 영원히 그러겠지.

언제나 단정한 복장을 유지하지만 치료를 하는 데 방해가 되어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외투를 벗어두는 일이 잦다. 오른손 손목에는 이오에게 받은 팔찌가, 왼손 손목에는 태드에게 받은 보랏빛 공단 리본이 묶여있으며 검지엔 데클렌에게 받은 반지를 끼고 있다. 브로치는 크리스틴에게 받은 만년필에 묶여있던 검은 리본과 데클렌이 만든 푸른 장미꽃으로 이뤄져있다. 이젠 소매에 잉크가 묻을 일은 사라졌지만, 온갖 약초나 약품이 셔츠에 물드는 일이 잦아졌다. 어깨와 가슴팍, 왼팔 부분에 생겼던 깊은 자상은 결국 언제까지나 안고 가게 될 흉터가 되었다. 흰 모래사막같은 피부에 점들이 꽤 많이 있는 편으로, 가토 로카유의 큰 특징 중 하나였으나 몸을 아끼지 않고 지내온 탓에 무릎팍에 난 잔 흉터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몸 군데군데에 잔상처들이 빼곡하게 늘었다.

[ 여유없는ㅣ외유내유ㅣ이타적인ㅣ수동적인 ]


차분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항상 다정하게 보이는 옅은 미소를 띄고 있음에도 상대방에게 느껴지는 것은 불안과 공포, 여유 한 줌 찾아볼 수 없는 초조한 감정 뿐이다. 길고 긴 전쟁통을 겪으며 경험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 및 사건들로 인해 만성적인 피로, 습관적인 걱정으로 가득찬 탓에 말랑말랑하고 유순하다고 보일 정도의 다정한 태도 역시 유약해보일 따름이었다. 겉으론 밝아보여도 종종 차게 식는 것이 느껴질 때도 있다. 성인이 된 만큼 이 상황을 버티기 위하여, 남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전과 똑같은 태도를 고수하는 것 때문에 느껴지는 분위기의 차이가 심각했다.

겉은 여전히 유한 모습 그대로이다. 마음 역시 심약하여 쉽게 충격받고, 상처받으며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급격하게 흔들리는데 그 모든 감정을 어찌 할 줄 몰라했다. 평민 아이들이 행방불명 되었을 때 불안해하고 모든 것에 겁먹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했다. 온실 속에서 자란 만큼 알맞은 햇살과 기후에 놓여야 성장할 수 있었던 나약한 아이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뛰어넘은 전쟁통에 놓여져 강해지지 못하고 그대로 꺾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잔정이 많다. 남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좋아하고,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호감을 갖고 행동하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나선다. 자신이 손해보는 일이 생겨도 괜찮다며 넘길만큼 사람들에게 많이 물렀다. 심지어 극단적일 정도의 손해를 보아도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남들을 신경쓰는 만큼 자신에게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기도 했다. 다만 앞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에 방해가 되거나, 목숨에 지장이 생길 정도라면 그땐 자신이 먼저 몸을 슬쩍 피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아낌없이 마음을 퍼주던 그는 그만큼의 반동을 몸으로 겪고 있을 뿐이다.

수동적인 면모는 이제 견고히 자리잡았다. 그는 지금까지 오르텐시아와 로카유라는 환경에 놓여 체계와 명령을 따르는 데 익숙해졌었다. 더불어 파벨라에 입단한 뒤로 자신의 의견과 정반대되는 명령을 받아오며 생각하려는 의지를 접어두고 멍하니 명령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에 대한 차별 발언을 들을 시에 저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는 면모는 고치지 못했다.

▶ 로카유 ㅣ rocaille

<그림>에 위치한 도시와 빈민가의 경계에 자그마한 영지를 갖고 있...었던 악명 높은 자작가.
인덕을 무시하고 오직 돈만 바라보며 쌓아올린 부와 지위는 한순간에 불타올랐다.

리멘 81년 겨울 발생했던 가토 로카유 살해미수 사건에 뒤이어 벌어진, 82년 겨울의 로카유 가 습격사건은 로카유 가의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가토 로카유를 습격하였던 카살리스 일원의 생사가 불분명했던 탓에 분노한 카살리스 동료 일부가 일으킨 로카유 가 습격사건은 전소한 저택, 가주 파베 로카유의 사망, 다수의 부상자 및 막대한 손해를 낳고 불길과 함께 잠잠해졌다.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은 로카유 자작가는 졸업 직후 돌아온 가토 로카유의 작위 계승과 동시에 몰락하였다. 막 성인이 됐다고 하나 지금까지 가주에 대한 수업을 전혀 받지 못하고, 로카유 가를 지탱할 수 있었던 모든 가게들을 화재와 습격으로 잃은데다 망가진 영지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 역시 없었던 로카유는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로카유의 이름을 버리지 말라." 가주를 물려받을 시 조건이었던 전언을 따라, 사유재산 및 작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국가에 영지를 반환한 자작 가토 로카유는 습격 탓에 큰 부상을 입은 어머니 샬롯 로카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쟁의 손길이 적게 닿을 고향 <카프카>로 요양보냈다.

전쟁이라는 시국에 로카유라는 작은 자작가의 이름은 소동에 묻혀 사라지는 듯 했으나, <그림> 내의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던 장소나 더욱 비참한 삶을 살게 된 빈민가에서 가토 로카유가 사유재산을 써 신분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돌며 아직 로카유의 이름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런 활동이 위선적이라고 느껴질 법한 <그림> 내의 좋지 못했던 로카유의 평판, 작은 도시 내에서 적 아군 가리는 것 없이 전부 도움을 주고 치료를 하는 탓에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잦아져 전쟁이 시작된지 2년 후, 치료를 받던 카살리스 쪽 사람에게 큰 부상을 입은 가토 로카유가 거취를 옮겼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그림> 내에선 '로카유'에 대한 소식이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 <파벨라> 입단

<그림>에 계속 있다간 남을 돕기는 커녕 살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판단한 로카유는 <그림>을 제외한 모든 도시를 발길 닿는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4년째가 되어 도착한 <셰익스페라>는 나라의 중심지이자 수도인만큼, 다른 곳보다 훨씬 크고 잦은 전투가 일어났다. 넓은 땅에서 로카유는 소문 나는 일 없이 눈에 닿는 전투마다 뛰어들어가 불편한 몸으로도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치료할 수 있었다. 난민들을 돕고, 가끔 치료하는 법이나 약제 제조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로카유는 우연히 높은 지위의 파벨라 기사와 카살리스 단원을 동시에 치료한 탓에, 자신이 치료했던 파벨라 기사에게 잡혀갔다. 반란군인 카살리스를 치료하여 도왔기에 즉결처분을 했어야 하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군의관을 목표로 공부했던 오르텐시아의 학생이라는 점과 수년간 단련되어 수준급인 의료실력을 높이 산 파벨라의 기사는 왕실을 위해 그 목숨을 바치든지 반란군을 도운 반동분자로써 개죽음을 당하든지 택일을 하라 종용했다.
소속된 곳이 없어 왕실쪽와 카살리스 쪽 전부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아 지칠대로 지쳤고, 범법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던 동시에 파벨라가 되었을 친구들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로카유는 그대로 파벨라 기사의 추천을 받아 군의관이 될 수 있었다.


▶ <파벨라>

파벨라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터럭 한 올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정당한 권력에 가장 가까운 좋은 위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뿐일 뿐. 파벨라 소속이 된 뒤로도 남는 시간을 약초를 연구하는데 쓰거나 상처 치료에 대해 실습하는 등 의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으며, 훈련은 몸상태에 맞춰 가볍게 하는 듯 하다. 파벨라로 들어가기 전에 겪은 여러 우여곡절 탓에 자신을 지킬 정도의 검술 실력만 남았다. 애용하던 활도 더이상 연습하지 않고 그저 위협사격 정도만 가능할 정도로 남겨두었다.


▶ 기타사항


▷ 가토 로카유
친구들을 제외하곤 모든 사람들에게 존대를 사용하게 되었다. 말투는 느리고 부드러우며,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아 이야기하기에 다정하고 상냥하다. 다만 친구들이 아닌 사람들, 특히 귀족들에게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와 태도로 대화에 임해 지적받는 일이 잦다. 감정표현은 풍부한 그대로며 되도록이면 긍정적인 감정표현을 하려고 노력한다.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상대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은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 건강
몸이 성치 못하다. 고등부 2학년 겨울방학에 가슴 및 어깨, 왼팔에 입었던 치명적인 자상을 선두로 약 5년 동안 길거리에서 구르며 해본 적 없던 강행군을 하는동안 입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한 몫했다. 지구력은 많이 좋아졌지만 근력 등은 매우 나빠졌다. 몸이 안 좋거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환상통에 시달리는 탓에 왼손으로 들었던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곤 한다.
다만 맷집만큼은 있어 힘든 훈련 시에도 잘 버티며, 타인에게 공격을 받았을 시엔 아픈 것을 전혀 티내지 않는다. 잘 버티고 티내지 않는다고 해서 아픈 것까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한다. 그러나 자상에 의한 상처를 입을 시엔 트라우마 탓인지 가끔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곤 한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와는 별개인 듯.


▷ 죽음과 부상에 대하여
타인이 다치는 것을 가만 두고 보질 못한다. 아프거나, 상처를 입거나. 예전부터 다른 사람의 건강에 신경쓰고 몸을 염려했던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인상을 쓰고, 상대에게 서툴게 화를 내거나 우는 일도 있을 정도. 너무나도 많은 죽음과 부상을 보아왔기에 무뎌질만도 했으나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그 변치 않을 감정은 스스로를 사람으로 있을 수 있게 했으나 정신건강까지는 지켜주지 못했다.
지킬 수 있다면 지키고 싶어했다. 곁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군의관이라면 누구도 다치게 할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도 했었다. 부질없었지만. 가토 로카유는 제 자신 속의 모순과 싸웠다. 지키고 싶어서 누군가를 치료해주고 힘을 보태주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해친다는 그런 모순. 결국 자신이 남을 해하는 것과 다를 것이 뭐 있는가, 하고.


▷ 기타
짙은 약품 냄새와 약초향이 몸에 배었다. 가까이 가면 느껴지는 짙은 향 사이에서 나는 희미한 향은 데클렌이 선물해준 향낭과 향유에서 나는 향일 것이다. 그림 출신이라 그런지 추위를 많이 탄다. 여전히 따듯하고 말랑한 것을 좋아한다. 가끔 머리 속이 너무 복잡할 때면 어릴적부터 쓰던 수첩을 꺼내 그림을 그리곤 한다. 주로 친구들을 그리는 일이 잦은 듯.

친구들에게 받은 물건들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나뭇잎 책갈피, 세잎클로버, 팔찌, 만년필, 공단 리본, 말린 꽃과 약초가 들어있는 향낭과 향유, 푸른 장미, 깃털펜, 수국 책갈피, 졸업파티 때 받은 꽃들 등등은 언제나 가토와 함께 했다. 파벨라에 들어간 후론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들을 빼곤 잘 갈무리해서 보관하는 듯.


▷ 마지막으로 남은 동화같은 바람
전쟁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사막을 보러가거나 바다를 보러가는 등,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바다를 보러가자, 희게 빛나는 사막에서 고래를 찾아 밤하늘을 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서 자유롭게 지내는거야."
시국과 전혀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생각이고, 말 그대로 동화적인 바람이지만 그 몽상 한 자락만큼은 차마 끝까지 놓지 못했다.


「단짝친구, 흑송나무 친구는 화마 저 너머로.」


졸업하기 전, 포코포코와 서먹하게 헤어진 뒤로 다시 포코포코의 소식이 들려온 것은 전쟁이 시작한 뒤로 약 1년 뒤였다. 하위 귀족을 죽이고 도주했다는 포코포코의 수배전단을 본 뒤 새까매진 머리로 가토 로카유가 본능적으로 한 일은 흑송 숲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먼 어린 시절 언젠가처럼 너는 거짓말처럼 흑송 숲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냐는 말로 시작해서 이야기를 나눈 포코포코는 놀랍도록 감정적이였다. 귀족을 죽였다 털어놓는 포코포코를 가토 로카유는 가만히 안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언제나 너보다 높은 신분인 사람들이 널 괴롭히는구나 싶어서. 네가 무사한 걸로 저는 족하다 생각했다. 흑송 숲에 머물 것 같다는 이야기에 약 3일에서 4일간 가족의 소식을 찾아보고, 요기할 것을 가져다주면서 예전처럼 함께 나무에 올라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함께 방랑자가 되는 건 어때, 종업원이 되는건? 흑송나무 숲에서 함께 하는 동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을 듣기 전 포코포코는 마치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나무에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쪽지를 남겨두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던 가토 로카유는 4년 뒤, 파벨라와 카살리스의 중립지역에서 포코포코를 조우했다.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하지만 어째서 네가 그 곳에?' 같은 친구였던 데클렌과 함께 너는 화마처럼 붉은 옷을 걸치고 저와 반대편에 서 있었다. 애매한 감정만이 우리 셋 사이의 중립구역을 떠돌았다. 정말 우리는 갈라졌구나, 화마가 있던 그 날부터 우리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거야? 난 아직도 널 포기할 수 없는데.

「비밀기지는 잠깐 마음 속에 묻어뒀을 뿐이야.」


졸업 후, 데클렌과 조우한 것은 그림에서의 데클렌의 약방에서였다. 데클렌 모르건이 자신만의 비밀기지를 개조하여 약방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안 가토 로카유는 그림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다닐 때 가끔씩 들려 약초를 사곤 했다. 데클렌의 복수 계획을 들으며 마음 속 깊이 응원하곤 하던 일은 제가 먼저 그림을 도망치듯 떠나면서 갑작스래 끊겼다. 데클렌은 잘 지내고 있을까,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타지에서도 데클렌에 대한 걱정은 끊이질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조우하게 된 데클렌은 티니-포코와 함께 붉은 옷을 걸치고 카살리스의 진영에 서있었다. '데클렌, 어째서?' 데클렌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레기나께 감사한 것도 잠깐,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만 한다는 현실에 탄식하였다. 데클렌과 티니-포코의 전과 같지 않은 눈빛과 서로를 향한 애매한 감정이 저희 사이를 떠도는 듯했다. 제게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데클렌이 제게 까칠하게 대하고, 화를 내는 것에도 저는 오늘도 이기적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데클렌의 주변을 맴돈다. 미안해, 하지만 난 데클렌 널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어서 레기나께 감사해. 미안해, 난 아직도 네게 진심이야.

「길을 함께 하게 된 편지 친구.」


세스와 케인의 앞날이 서로 나뉘었다는 사실은 풍문으로 들었지만, 이렇게 전쟁터에서 조우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몰락했던 기사단을 키우며 전쟁터를 돌아다녔다는 세스는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가토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전쟁터에서 위험한 상황을 겪고 겪을 세스를 염려하며 그 이후에도 서로를 향해 간단한 안부나 생존신고 정도의 편지를 간간히 주고받게 되었다. 편지로는 비록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파벨라에 입단 후 다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새로이 생겼다. 동고동락하는 동료가 되어 네가 저쪽으로 넘어간 케인을 어찌 생각하는지, 제가 네게 도움이 될 일이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하루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너와 함께 하게 되어서 기뻐, 세스.

「길이 엇갈린 편지 친구. 」


졸업 이후도, 방학마다 편지를 보내던 습관은 어디 가질 않아 가토 로카유는 첼레스테 상단에 편지를 계속 보냈다. 제대로 닿고 있는지, 읽고 있는지 알 수 없던 나날이 이어지는 와중 22살이 되던 해, 케인이 카살리스로 들어갔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소문에는 귀가 어두워 어떤 이유로 카살리스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저렇게 진영을 밝히면 위험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케인이 카살리스에 들어간 사실은 가토가 계속해서 케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네가 카살리스에 들어갔어도 계속 저의 편지 친구인 케인일테니까. 어렴풋이 들리는 네 행보를 소문으로 들으며 파벨라에 입단하는 그 순간까지도 네가 아프지 않고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런 식으로 다시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야, 케인.

「"네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수 밖에 없었어."」


전쟁도 몰락한 집안의 사정도 케이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 간격은 어쩔 수 없이 꽤 길었으나 케이가 준 상아 만년필로 쓴 편지를 써보낼 때마다 걱정과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보내고 받기를 몇 년 째, 여느 때처럼 교전지역에서 정신없이 다친 이들을 치료하던 와중 케이와 졸업 이후 처음 조우했다. 파벨라복을 입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날카로운 눈빛을 한 케이를 가토는 한번에 알아보았다. 다만 정신없는 상황에다 카살리스로 오인할 수 있는 제 행색을 깨닫고 "케이", 하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절 공격하려던 케이가 검을 놓쳐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혀버렸다.지금도 그 흉은 남아있을까? 기겁하여 제가 치료해주던 와중에도 '혹 카살리스냐' 묻는 케이의 눈빛은 무척 다급해보여 미안함이 일었다. 제가 교전지역을 골라 적아군 가림없이 치료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안 케이는 위험한 전장에는 가지 말라 이르며 정보를 주고 절 치료해주는 등 여러모로 챙겨주었으나, 그 정보를 받고 제가 되려 위험한 전장에 뛰어든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꺼지?" 그럼에도 정보를 보내주며 저를 지지하는 케이에게 파벨라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24세의 나이로 파벨라 소속이 된 뒤에도 감사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파벨라에 영 적응하지 못하는 저를 선배답게 챙겨주는 케이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전쟁이 끝나면 미뤄뒀던 여행을 떠나자. 네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카프카의 밤 사막은 어때? 마지막의 마지막엔 나를 위해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쉽지 않겠지만 말야.

「"난 변함없이 널 좋아해."」


졸업하고 난 뒤 5년, 편지로 아주 가끔씩 소식을 나누던 시에라와 처음으로 파벨라에서 조우했을 때 시에라의 성은 에버하르트에서 아이베르크로 바뀌어 있었다. 호외로 돌아 풍문으로 슬쩍 들었던 에버하르트의 몰락에 시에라가 일조했다는 것, 에버하르트를 버리기 위해 살아왔다는 시에라의 비밀을 듣고 나서도 가토 로카유는 한 점 달라짐 없는 눈으로 시에라 아이베르크를 바라보았다. 어떤 일을 하던 시에라가 원하는 일을 했고, 이루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시에라가 그런 일을 하며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전쟁과 피로에 무뎌진 뇌에 부드러이 스며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후 시에라 아이베르크의 행동은 가토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굴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인질을 나쁘게 다루는 모습을 보인다던지, 간간히 제게 내비쳐지는 잔혹함과 저는 원래 이러했다는 눈빛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괴로워했다. 확실한 것은, 가토는 아무리 시에라가 가혹히 굴어도 여전히 변함없는 애정 가득한 눈빛을 담아 너를 바라볼 것이라는 사실. 그래서 좋은 방향으로, 네가 저와 함께 다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사실. 제게 잔혹하게 굴지 말아달라, 다정히 대해달라는 애끓는 갈망과 애원 섞인 시선은 네게 어떻게 느껴질까? 그야, 넌 내 소중한 친구니까. 시에라는 언제나 시에라였으니까. 알고 난 뒤에도 네 곁에 있다는 생각은 못 해봤어?

「솜사탕 같이 달콤했던 여행의 한 페이지.」


졸업 후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와중 약 3, 4개월이 지난 뒤 그림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잭 니콜스, 가토 로카유가 '솜사탕'이라 부르는 그는 전세계를 떠돌며 여행을 하고 있다 이야기했다. 학창시절에 함께 여행을 떠나자 흘러가듯 권유했던 것을 토대로 가토 로카유와 잭 니콜스는 함께 몇 개월동안 잠깐 둘이서 여행을 떠났다. 잔혹했던 현실에서 도피하려던 가토와,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던 잭은 마음 편한 여행친구로써 즐거이 여행을 다녔다. 진기명기 수준으로 맛있는 음식을 엄청 먹기도 하고, 유랑시인이나 공연 등을 보러다녔고 잭이 궁금해하던 카프카의 사막을 횡단하기도 하며 동화같은 한 때를 보냈다. 카프카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전쟁통에 다친 사람들을 돌보고 싶다는 제 말에 '잘 어울리겠네.' 하고 이야기해준 잭 덕분에 앞으로 헤쳐나갈 4년간의 구호활동은 탄력을 잃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다. 헤어질 때 서로 몸 조심하라며 주고받았던 물건 중, 잭에게 받은 코팅된 세잎클로버는 힘들때마다 한번씩 꺼내보며 소중했던 여행의 한 때를 추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연을 관람하는 솜사탕의 옆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것은 초콜릿만의 작은 비밀이라고.

「"전담 환자, 약제 제자."」


파벨라에 입단하여, 신참인 제가 파벨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저보다 한 해 일찍 입단한 셰리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저를 챙겨주고 나름대로 지켜주려는 모습을 보며 깊은 고마움을 느끼는 마음을, 전투만 나가면 피투성이가 되는 셰리스의 몸상태 덕에 꼼꼼히 치료하고 잔소리를 하며 아낌없이 내보이고 있다. 좋게좋게 웃으며 넘기는 셰리스와 반쯤은 겁나고, 반쯤은 즐거이 소동에 휘말리기도 하며 다사다난하지만 즐거운 파벨라 생활을 보냈다. 의학이나 약초를 다루는 것에 흥미가 있어보이는 셰리스에게 실무 의료를 드문드문 알려주며 지식이 꽤 늘었다는 것에 뿌듯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전과 달라짐 없이 이야기를 해주는 셰리스와 대화하는 것은 가토에게 있어 얼마 안 되는 즐거운 나날 중 크게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내 마음을 알면 심하게 다치지 않도록 조금 자제해 줘, 아니면 다칠 시 감추지 말고 이야기해줘. 네가 스스로 얼마나 잘 치료했는지 살펴봐줄게.

「"나는 네게 항상 받기만 하는구나."」


졸업 후 슈가를 다시 만난 것은, 전쟁 초기 그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도르체 가의 사람을 우연히 치료했을 때였다. 전장에서 슈가와 마주칠 줄 몰랐던 가토는 깜짝 놀라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슈가와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도르체의 가주에 올라 오르텐시아의 몇몇 친구들과 사업이나 협업, 가신을 늘려가며 힘내고 있다는 슈가를 가토는 마음속 깊이 응원하였다. "거 봐, 넌 잘 할 수 있다니까? 그래도 오르텐시아 때처럼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지?" 슈가는 언제나 가토를 챙겨주었다. 로카유 가가 몰락하여 갈 곳이 없어진 가토를 도르체 저택에 지내라 권유한 것은 물론이요, 로카유 가의 부흥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물론 몰락한 것은 자업자득이고 도르체의 평판이 좋지 않아질까봐 상냥한 제안들을 완곡히 거절했던 가토 로카유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도르체의 폭정이나 귀족중심적인 소문에 로카유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기도했다. 만남이 갑작스러웠던 것 처럼, 헤어짐도 갑작스러웠다. 가토 로카유가 그림에서 떠나기 직전, 카살리스에 의해 큰 부상을 입고 도르체 가에 잠시 신세를 졌던 때가 마지막이었다. 자신의 치료를 해주고 저를 돕겠다 말하는 슈가에게 가토는 "제가 그림을 떠난 뒤의 빈민가의 구휼활동을 부탁한다"고 이야기했으나, "온정을 베풀었다가 또 기어오르면 어떡하냐"는 둘 사이의 의견차로 인해 부탁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헤어지기 전 제게 마석통신기를 선물해준 슈가를 위해, 가토는 그림을 떠난 이후로도 종종 슈가에게 마석통신기로 연락을 하곤 했다. 언제나 표현을 어려워하는 슈가였으나 저를 생각해주는 마음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가토 로카유는 스스럼없이 슈가 S. 도르체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네게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슈가. 그러니 내가 네게 주는 애정도 익숙해지는 게 어때? 난 계속 변치 않을 가토로 남아있겠다고 약속했잖아."